입력 : 2014.02.03 05:49
이지혜 사회정책부
이지혜 사회정책부
담배 소송 60년 경험을 가진 미국에서도 1954년 첫 소송이 제기된 이후 거의 40년간 판판이 담배회사가 승소했다. 약 800건 소송에서 한 번도 담배회사를 이기지 못했다. 그러다 1994년, 반전이 시작됐다.

1994년 4월 필립모리스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던 빅터 드노블 박사는 "1980년대 초 필립모리스는 동물 실험을 통해 니코틴의 중독성을 확인했으며, 이를 논문으로 발표하려던 자신을 해고했다"고 의회에서 증언했다.

한 달 후, 담배회사 '브라운 앤드 윌리엄슨(BW)'을 대리하는 로펌에서 일하던 한 비서가 BW의 비밀문서를 유출했다. 1만 쪽이 넘는 BW 내부 문건을 복사해 캘리포니아주립대(UCSF) 스탠톤 글란츠 교수에게 넘긴 것이다. 간접흡연의 피해를 연구해 온 글란츠 교수는 금연운동가로 이름이 높았다. 그는 유출된 문건을 되돌려 달라는 BW의 소송을 물리치고, 되레 '담배 문건 도서관'을 세웠다. 이 문건들은 담배회사들이 1960년대부터 알고도 숨겨온 사실, 즉 담배의 본질은 니코틴 중독이고, 중독성을 유지하기 위해 니코틴 함량을 조절했으며, 청소년과 여성을 타깃으로 의도적인 마케팅을 펼쳐왔음을 밝히는 결정적 증거가 됐다.

폭로는 이어졌다. BW에서 해고당한 전직 기술임원 제프리 위간드 박사의 증언이 1996년 월스트리트저널(WSJ)과 CBS 시사 프로그램 '60분'을 통해 공개됐다. 그는 회사의 비밀을 누설하지 않는다는 계약을 파기해 피소되는 상황에서도, 담배의 중독성을 높이기 위해 발암성 화학물질을 첨가했다고 털어놨다. 훗날 '인사이더(The Insider)'라는 영화로도 알려진 그 얘기다.

1998년 미국 46개 주 정부가 4개 담배회사로부터 200조원이 넘는 배상을 받아낸 데는, 이렇듯 다양한 사람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다. 이전의 소송과 달리 정부가 원고로 나섰다고 해서 쉽게 얻어진 결과는 아니었다. 자본력과 로비력을 갖춘 담배회사를 상대하기가 그만큼 힘들다는 뜻이기도 하다. 2003년 세계보건기구(WHO) 주도로 담배규제기본협약(FCTC)이 체결된 것도, 각국 정부조차 담배 규제가 쉽지 않아 국제 공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FCTC 초안을 작성한 미국 조지타운 로스쿨 앨린 테일러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담배회사들은 흡연의 해악을 밝힌 연구를 반박하는 자료를 내도록 연구자들을 지원한다. 흡연할 권리를 주장하는 단체 뒤에는 대부분 담배회사가 있다. 세계 어디서 소송이 벌어지건, 축적된 전략을 공유한다. 주로 기술적 법리나 절차를 문제 삼아 시간을 끌면서 상대가 늘어나는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나가떨어지게 한다."

최근 우리나라 건강보험공단도 담배 소송을 제기하기로 결정했다. 미국 사례에서 보듯, 길고도 험난한 싸움이 될지 모른다. '정부기관마저 졌다'는 판례를 남기지 않으려면 이사장이나 경영진이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을 철저한 준비가 있어야 한다.

이지혜 | 사회정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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