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01.28 14:45 | 수정 : 2014.02.21 15:54

흉노왕 선우는 하늘의 아들이자 위대한 지도자 <무위2>

신라 김씨 조상은 흉노 휴도왕 태자 김일제였다
몽골고원의 북아시아 초원지대는 해발 1000m 이상의 고지대가 비교적 평탄하게 펼쳐져 있다. 텡게리(騰格里), 바단지린(巴丹吉林), 오로도스 사막 외에도 유목하기에 적당한 목장과 삼림이 이어져 있다. 그리고 남쪽에는 음산산맥(陰山山脈)이 있어 유목민의 활동에 천연울타리가 되어 준다. 이런 까닭으로 흉노를 비롯한 선비, 거란 등의 기마민족들이 이곳에서 창궐하였다.

음산산맥 북쪽이 유목문화의 근거지라면 그 남쪽은 농경문화의 근거지다. 그런데 음산산맥을 경계로 북쪽의 기후는 변화가 심해 식량수급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 과정에서 유목민족과 농경민족은 필연적으로 충돌하였는데, 대부분 유목민의 공격으로 싸움이 벌어졌다.

흉노는 한때 음산산맥 북쪽의 광대한 지역에 제국을 건설하였다. 전성기의 흉노는 한족 국가보다 3배나 넓은 영토를 다스렸다. 중국은 한나라 무제 이전까지 흉노에게 해마다 엄청나게 많은 조공을 바치며 굴욕적인 평화를 유지하였다. 한무제는 이런 굴욕에서 벗어나려고 즉위하자마자 흉노를 공략했으며, 위청과 곽거병 같은 장군들의 노력으로 결국 하서주랑에서 흉노를 몰아낸다.

흉노의 왕을 선우(單于)라고 부르는데, 이는 ‘탱리고도 선우(撑犁孤塗單于)’의 줄인 말이다. ‘탱리’는 하늘이고 ‘고도’는 아들을 의미하는 것이니, 탱리고도는 결국 ‘하늘의 아들이자 위대한 지도자’라는 뜻이다. 흉노는 드넓은 제국을 경영하기 위해 좌현왕과 우현왕, 좌곡왕과 우곡려왕, 혼야왕과 휴도왕을 두어 각각의 영역을 나누어 다스렸다. 하서주랑은 혼야왕(渾邪王)과 휴도왕(休屠王)이 다스리던 지역이었는데, 지금의 무위 일대는 휴도왕의 관할이었다.

한 무제의 철썩 같은 ‘김일제’ 신임

기원전 121년 여름. 곽거병 장군이 이끄는 한나라 군대는 기련산 일대를 공략하여 혼야왕과 휴도왕에게 엄청난 타격을 입힌다. 3만2000명을 사살하고 흉노 왕족을 포함한 2500여 명을 포로로 잡은 것이다. 흉노의 선우가 책임을 묻자 혼야왕과 휴도왕은 한나라에 투항하기로 한다. 하지만 투항하기 전에 휴도왕이 이에 동조하지 않자, 혼야왕이 휴도왕의 진영을 급습하여 휴도왕을 살해하고 4만여명의 흉노족을 이끌고 곽거병에게 투항한다.

이때 휴도왕의 태자인 일제(日磾)와 동생 윤(倫)이 어머니와 함께 한나라로 끌려간다. 포로가 된 두 왕자는 궁정의 말을 돌보는 일을 맡았는데, 어느 날 무제가 연회를 베풀며 궁정의 말들을 사열하는 과정에서 일제를 발탁한다. 그리고 그가 흉노 출신으로 제천금인(祭天金人⋅금가면을 쓰고 하늘에 제사지내는 사람)을 하였기에 김씨 성을 하사한다. 이때부터 휴도왕의 아들 일제는 김일제(金日磾)로 불리게 된다.

김일제에 대한 무제의 신임은 두터웠다. 그리하여 부마도위(駙馬都尉), 광록대부(光祿大夫)를 제수하고, 자신의 경호까지 맡겼다. 많은 신하들이 오랑캐 출신을 신임하는 것에 대하여 불만을 터뜨렸으나 무제는 괘념치 않았다. 그러던 중, 시중인 망하라(莽何羅)가 무제의 침실에 침입하여 무제를 살해하려는 것을 김일제가 격투 끝에 체포한다. 이 일로 무제의 신임은 더욱 커졌고 신하들도 그를 폄하하지 못하였다. 무제는 김일제를 자신의 딸과 혼인까지 시키려고 했으나 김일제는 겸손히 사양한다. 임종을 앞둔 무제는 곽거병의 동생 곽광과 김일제를 부른다.

“내가 죽거든 막내아들을 세우고 그대는 주공(周公)의 일을 하라.”
“신은 김일제보다 못합니다.”
“신은 외국인이요, 곽광보다 못합니다.”

김일제, 무릉의 배장묘에 안치된 유일한 외국인

무제는 곽광을 대사마대장군(大司馬大將軍), 김일제를 거기장군(車騎將軍)에 임명하고, 어린 황제(소제)를 보필하라는 유조(遺詔)를 남긴다. 아울러 김일제를 제후국의 왕인 투후(秺侯)에 봉한다. 투후가 다스린 지역은 지금의 산동, 섬서, 화북성 일대로 매우 넓다. 무제로부터 대단한 신임을 얻은 김일제이기에 그가 죽은 후에도 위청과 곽거병처럼 무제의 묘인 무릉(茂陵)에 배장(陪葬)되었다.
서안 무릉에 있는 김일제 묘
서안 무릉에 있는 김일제 묘
그러나 무릉의 배장묘인 김일제묘는 그야말로 초라하다. 수많은 관광객이 찾는 화려한 곽거병묘, 그 옆에 우뚝한 위청묘와는 완전 딴판이다. 묘는 가꾸지 않아서 풀만 울창하다. 묘비석이 없으면 이곳이 김일제의 묘인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다. 묘비석 앞으로는 자그마한 밭이 있으니 누군가 관리부실을 틈타서 농사를 짓고 있는 것이리라. 다 같은 무릉의 배장묘인데 왜 김일제묘만 천대를 받는 것일까.

그것은 중국인의 입장에서 볼 때면 흉노출신의 외국인일 뿐, 아무런 의미 없는 묘이기 때문이다. 찾아오는 사람도 없는 묘 앞에서 상념에 빠진다. 새 한 마리가 묘비석 위에 앉는다. 역사란 현재 살고 있는 자들과 관련되지 않으면 언제나 쓸쓸한 폐허뿐인 것임을 알려주고 날아간다.

김일제 후손들은 대대로 투후를 계승한다. 그러던 중, 서한 말 왕망(王莽)이 신(新)을 건설하면서 전성기를 맞는다. 왕망은 서한의 마지막 황제인 원제의 황후인 왕황후 동생의 아들로 김일제의 증손자인 당(當)의 이모부였다. 그러므로 왕망이 신을 건국할 때 투후인 김씨 일가가 많은 공헌을 한다. 신은 건국하자마자 많은 개혁을 단행한다. 하지만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조치로 호족들의 반발에 부딪혀 개국한 지 15년 만에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에게 패망하고 유수는 한나라를 부활시킨다.

김일제 후손들의 한반도 이동

왕망이 패배하자 김일제의 후손들은 엄청난 회오리에 말려든다. 대대로 세습되던 투후가 끊어짐은 물론 가문의 멸문지화를 면하기 위해서도 멀리 피신해야만 했다. 대부분은 그들의 옛 터전으로 도주하여 성을 왕(王)씨로 바꾸어 살았다. 그런데 한 갈래는 한반도로 들어와 신라와 가야국을 건설하였다고 한다. 김일제의 5대손인 성한왕(星漢王)이 신라김씨의 시조인 김알지가 되고, 김일제의 동생 윤의 5대손인 탕(湯)이 가야김씨의 시조인 김수로가 되었다는 것이다.

김일제에서 비롯된 신라김씨의 내력은 ‘문무대왕릉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신라 30대 문무왕(文武王․661∼681)은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수한 왕이다. 강대국 신라를 완성한 문무왕은 자신의 위대한 치적과 함께 신라에 대한 찬미, 신라김씨의 내력, 부친인 태종무열왕의 치적 등을 적었다. 그중 주목되는 것이 신라김씨의 내력이다.
문무대왕비 조각
문무대왕비 조각
‘신라 선조들의 신령스러운 근원은 먼 곳으로부터 계승되어 온 화관지후(火官之后:순임금의 관직명)니, 그 바탕을 창성하게 하여 높은 짜임이 융성하였다. (뿌리와) 가지의 이어짐이 비로소 생겨 영이한 투후는 하늘에 제사지낼 아들로 태어났다. 7대를 전하니 (거기서 출자)한 바다.’ 我新羅之先君靈源自 繼昌基於火官之后, 峻構方降, 由是克(紹宗)枝載生, 英異秺侯祭天之胤, 傳七葉而(所自出)焉.

이 비문은 조선시대 정조 20년(1796년), 경주에서 밭을 갈던 농부가 발견하였다. 당시 경주부윤이던 홍양호(洪良浩)가 탁본하여 지식인들에게 공개함으로써 알려졌다. 비문 발견 당시, 글자의 반 이상이 마모되어 읽을 수 없었으나 전체적인 윤곽은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비문을 눈여겨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문무왕의 후손으로 금석문의 대가인 추사 김정희도 언급하지 않았다.

정조 때 북학파(北學派) 학자로 ‘발해고’를 지어 남북국시대론을 주창한 유득공(柳得恭)이 김일제가 계림(鷄林)의 김씨인가라는 의문에 전문(全文)을 보지 못하여 증명하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그 후 이 비석은 돌멩이 신세가 되어 일제강점기 때 동네 아낙들의 빨래대로 사용되다가 일본인들에 의해 두 동강이 나는 수모를 겪었다. 현재 이 비석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글자가 새겨진 위쪽은 뭉개져버리고, 글자가 없는 아래쪽만 있다. 그나마 탁본이 남아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경주부윤 홍양호께 오직 감사드릴 뿐이다.

신라김씨의 족보를 찾아서

학계의 반대 논리도 만만치 않아 김일제의 신라김씨설은 정설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지만, 역사기행을 하는 나로서는 매우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비문의 내용이 어느 정도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학계의 의견이 분분한 까닭은 무엇일까? 문제는 ‘7대’의 해석에 있는 것 같다. 김일제의 5대 후손인 성한왕이 신라김씨의 시조라면서 그 후 7대의 연결고리가 설명되어 있지 않으니 김일제의 신라김씨 시조설이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무위 인민광장의 김일제 석상
무위 인민광장의 김일제 석상
아마도 이 비문에는 문무왕 선대의 기록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깨어져나간 비문에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었을 터이지만, 지금으로서는 남아 있는 단어를 가지고 추론할 수밖에 없다. 그중 첫 번째가 ‘화관지후(火官之后)’다. 그리고 진백(秦伯), 파 경진씨(派鯨津氏), 투후(秺侯), 가 주몽(駕朱蒙), 성한왕(星漢王) 등이다.

화관지후는 기원전 2300년의 순임금을 의미한다. 마지막은 문무왕 자신의 대(代)인 680년이다. 이렇게 볼 때, ‘7대’는 김일제로부터의 7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듯하다. 그렇다면 7대의 해석은 자연스러워진다. 화관지후로부터 문무왕까지 약 3,000년 동안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었던 시기를 일컫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금문학의 권위자인 재야사학자 소남자 김재섭(金載燮)은 ‘금문속의 고조선’에서 다음과 같이 구분하였다.
무위 남성문광장의 김일제 소개문
무위 남성문광장의 김일제 소개문
1) 화관지후(火官之后) : 기원전 2300년 전
2) 진백(秦伯) : 기원전 650년대
3) 파 경진씨(派鯨津氏) : 기원전 200년대
4) 투후(秺侯) : 기원전 100년대
5) 가 주몽(駕朱蒙) : 기원전 50년대
6) 성한왕(星漢王) : 서기 20년대
7) 문무왕(文武王) : 서기 660년대

소남자에 따르면 ‘진백’은 진시황제의 20대 선조이자 시황제가 천하통일의 대업을 달성할 수 있도록 기반을 닦은 진나라 목공(穆公)이다. 춘추시대 진(秦)나라의 9대 군주인 목공은 춘추 5패(五覇)의 한 사람이다. 동으로는 하서(河西)에서 서쪽으로는 서융(西戎)을 공략하여 사방 1,000리의 땅을 제패하여 진나라의 기반을 닦은 인물이다.
무위 남성문광장의 김일제 소개문2
무위 남성문광장의 김일제 소개문2
‘파 경진씨’는 진나라가 망하자 그 일족이 한반도의 경주나 밀양으로 파견한 휴도왕의 세력으로 해석하고 있다. ‘투후’는 이미 살펴본 김일제다. ‘가 주몽’은 휴도왕의 망명세력 중 일부가 고구려를 통해 신라로 들어가 미리 자리를 잡는 과정이라 해석하고 있다. ‘성한왕’은 김일제의 5대손으로 신라김씨의 시조인 김알지이다.

참으로 기막힌 해석이 아닐 수 없다. 우리 민족의 기원이 드넓은 대륙을 차지한 기마민족이었음을 확신하는 필자에게는 논리적으로도 어느 정도 타당성이 보인다. 특히 장례형식인 적석목곽분, 황금과 말을 숭배하는 금관과 천마도 등은 모두 기마 유목민족들의 고고학적 특징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지역에서 많이 출토된 오수전(五銖錢)은 왕망의 신나라 때 만들어진 화폐인데, 이로 미루어 보아도 김씨 일가들이 도피할 때 가져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중국의 金文, 동이족의 비밀을 푸는 열쇠

소남자의 이러한 해석은 중국의 금문학자 낙빈기(駱賓基)의 ‘금문신고(金文新攷)’를 기초로 한 것이다. 낙빈기는 평생의 연구결과로 이 책을 썼는데, 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의 저서로 인해 한국의 상고사가 보다 명쾌하게 해석되고 있다. 중국이 그토록 자랑하는 황제도 동이족의 시조인 신농씨의 사위였다는 부분에 이르면, 중국인은 물론 우리도 깜짝 놀라게 된다.
금문신고 표지
금문신고 표지
중국인은 자신들의 시조를 욕되게 했다는 점에서 그럴 터이지만 우리는 어째서 놀랄까? 우리가 어릴 때부터 배워온 역사와 상반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중국과 일제에 의해 철저하게 왜곡된 우리의 상고사를 그대로 전수하고 전수받는 사이에 사상과 논지가 고착된 결과이다. 우리 상고사에 대한 의문을 품고 이를 파헤쳐 보려는 노력 없이 오히려 이에 안주하여 온 것이니 어찌 우리의 역사가 바로설 수 있으며, 역사관 또한 올곧을 수 있겠는가.

무위시는 휴도왕의 본거지답게 그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시 중심인 남성문(南城門) 광장에는 무위시의 역사와 출신인물들을 소개해 놓았는데 이곳에 김일제의 내력이 적혀 있다. 인민공원에는 김일제의 석상도 있다. 흉노의 태자로서 한무제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은 점을 널리 알려 이곳에 거주하는 소수민족들을 통치하는 데 활용하는 게 아닐까? 김일제의 내력과 말을 돌보는 모습의 석상을 둘러보는데, 어린 아이 두 녀석이 마치 자신들의 형 인양 석상 앞에서 장난을 친다.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에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바라보고 있노라니 김일제 석상도 살아서 아이들의 재롱을 한껏 받아주고 있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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