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01.24 05:43

카톡에 단문 대답하면 쉽게 분노하는 '고약한 노인네 증후군'
사이버 스페이스는 추상적인 공간으로 인간관계도 피상적
스마트폰으로 애를 써도 황량한 허탈함은 메워질 수 없어
IT 강국 한국, 소통·관용·성찰의 편안한 의자 대량생산해야

김정운 문화심리학자 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사진
김정운 문화심리학자·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반응이 없거나, 성의 없는 인간들을 한둘씩 쳐내다 보니, 이제 몇 명 안 남았다. 그렇지만 내 처절한 교토의 일상을 몇 번이고 보고 간 김갑수·윤광준이 이렇게 무심할 수는 없는 거다. 자기 페북에는 허접스러운 글만 잔뜩 올리면서, 내 카톡에는 아주 성의 없이 단문(短文)의 대답만 하는 '내 친구 귀현이'도 이젠 아웃이다. 아내의 문자 또한 영혼 없는 이모티콘뿐이다.

꼭 일 년 전 일본에서 그림 공부를 시작했을 때, 그림이 완성될 때마다 아는 이들에게 사진 찍어 보냈다. 모두들 놀라워했다. 특히 젊은 처자들의 반응이 열화와 같았다. '와아 멋찌당' '어머, 교수님, 놀라워요' 어쩌고 했다. 그러나 이제는 다들 썰렁하다. 아예 내 문자를 '씹기'(!)까지 한다. 가증스러운 것들.

고독과 소외감으로 아주 쉽게 분노하고, 삐치며,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서 우울한 단서들만 찾아내 괴로워하는 '고약한 노인네 증후군'이 오십 초반인 내게 벌써 찾아온 거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곳의 내 모든 인간관계가 감각적 구체성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메일이나 문자를 통한 '사이버스페이스'상의 인간관계란 지극히 피상적일 수밖에 없다.

사이버스페이스는 말 그대로 텅 비어 있는 '공간(space)'이다. 현상학적 지리학을 대표하는 캐나다 토론토 대학교의 이푸투안 교수는 막연하고 추상적인 '공간'과 구체적인 감각적 경험을 통해 의미가 부여되는 '장소(place)'를 개념적으로 구분한다. 그에 따르면 '공간'은 구체적 행위나 상호작용을 통해 가치 있는 '장소'로 바뀐다. 집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커튼을 걷고 창문 너머의 먼 곳을 내다보는 미국식 삶이 공허한 이유는 집이 '장소'가 되지 못하고 '공간'이 되기 때문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집이 '사는 곳'이 아니라 '사는 것'에 머무르는 이런 현상을 가리켜 또 다른 지리학자인 에드워드 렐프 교수는 '장소 상실(placelessness)'로 정의한다. 한국의 아파트야말로 '장소 상실'의 대표적 사례다.

김정운 그림
김정운 그림
스마트폰을 매개로 하는 상호작용으로는 아무리 용을 써도 이 황량한 '장소 상실'에서 벗어날 수 없다. 'ㅋㅋㅋㅋ' 'ㅎㅎㅎㅎ'를 죽어라 반복하고, 각종 심란한 이모티콘을 제아무리 화려하게 구사해도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일이다. '사이버스페이스'는 결코 시공간적 구체성을 가진 '장소(place)'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온종일 스마트폰만 붙잡고 고국의 친구들이 날 기억해 주길 바라는 한, 장소 상실로 인한 '고약한 노인네 증후군'은 피할 수 없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눈만 뜨면 스마트폰에 머리 처박고 사는 이 땅의 중년 남자들이 '고약한 노인네'가 되는 것도 한순간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등산 사진' 카톡에 올리고, 시간 날 때마다 남들 페북을 돌아다니며 '좋아요'를 죽어라 누르고 다녀도 '장소 상실'로 인한 허탈함은 메워질 수 없다. 시공간적 좌표를 갖는 삶의 구체성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터넷상의 못된 악플러 절반 이상이 중년 남자인 거다.

의자를 사야 한다! 뒤로 약간 자빠지듯 편안하게 앉을 수 있는, 그런 의자를 사야 한다. 의자야말로 '공간'을 의미 있는 '장소'로 만드는 가장 훌륭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왕과 귀족의 지배에서 풀려난 근대 부르주아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자신들만의 의자를 만드는 것이었다. 저 유명한 '치펀데일풍(風) 의자'가 바로 그것이다. 의자에 앉았을 때, 주체로서 삶이 확인된다는 이야기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거지 같은(!) 성격 때문에 평생 대인관계 장애에 시달렸던 애플사의 스티브 잡스가 어디로 이사 가든, 르코르뷔지에가 디자인한 1인용 가죽 소파만큼은 꼭 들고 다녔던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사이버스페이스에서 겪게 되는 장소 상실로 인한 우울함을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뒤로 자빠지는 의자'는 구원이었다.

앞에 서 있는 사람을 한없이 기죽이는 권력용 회전의자나 검사 앞의 접는 철제 의자는 결코 아니다. 허리 꼿꼿이 세워 앉아야 하는 사무용 의자 또한 절대 아니다. TV 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쓰러져 자게 되는, 3인용 '인조가죽 소파'는 정말 최악이다.

한쪽 팔로 턱을 괴고 기품 있게 사색하거나, 턱을 만지작거리며 우아하게 책을 읽을 수 있는, '자세 나오는' 의자여야 한다. 의자는 성찰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맞은편 사람을 그윽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 폼 나는 의자에 앉아서 스마트폰 따위를 만지작거리는 일은 정말 없어야 한다.

숟가락을 잡으면 뜨게 되고, 포크를 잡으면 찌르게 된다. 도구가 행위를 규정한다는 이야기다. 도구는 의식을 규정하기도 한다. 아주 편하고 기분 좋게 앉을 수 있는, '뒤로 자빠지는 의자'로 규정되는 의식이란 바로 '소통과 관용'이다.

IT 강국을 자처하는 한국에서 가장 시급하게 필요한 일은 국산 '뒤로 자빠지는 의자'를 대량생산하는 일이다. 서양의 롱다리를 위해 디자인된 수입 의자에서 짧은 다리 꼬고 앉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땅의 중년 사내들이 '고약한 노인네 증후군'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이 소통과 관용의 '뒤로 자빠지는 의자'가 없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뭐… 순전히 내 생각이다!
김정운 문화심리학자·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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