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01.20 18:27 | 수정 : 2014.01.21 09:00

승리감에 도취된 중공군, 서울 점령 후 병력·물자 부족에 빠져

(4)지평리 전투

이승만을 닦달한 리지웨이

중공군 진영에 뭔가 문제가 생겼던 모양이다. 서울을 점령하면서 중공군은 완연한 승세(勝勢)를 보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서울 이남의 전선에서는 멈칫거리는 기색이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참전 이래 전선을 하루 평균 10㎞씩 밀고 내려왔다. 국방부가 펴낸 <6·25 전쟁사>에 따르면 압록강에서 수원~강릉을 잇는 북위 37도선까지 내려오는 데 38일이 걸렸다.

대나무에 칼집을 낸 뒤 그를 쭉 갈라 곧 쪼개는 그런 모습, 이른바 ‘파죽지세(破竹之勢)’와 다름없는 공세였고, 그에 밀려 유엔군과 국군은 제대로 반격도 펼치지 못한 채 후퇴만을 거듭했던 상황이었다. 중공군을 지휘하던 펑더화이(彭德懷)는 1951년 2월 무렵 베이징(北京)으로 돌아가 마오쩌둥(毛澤東)에게 전황에 관한 보고를 했다고 한다.
한국 전선 부임 직후 이승만 대통령(왼쪽)을 방문한 리지웨이 미8군 사령관(오른쪽). 잦은 불만을 토로해 이승만 대통령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한국 전선 부임 직후 이승만 대통령(왼쪽)을 방문한 리지웨이 미8군 사령관(오른쪽). 잦은 불만을 토로해 이승만 대통령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사실 중공군은 그 무렵 기고만장(氣高萬丈)했다. 세계 최강의 미군을 상대로 그야말로 일방적인 공세를 펼쳐 대한민국 수도 서울을 점령했으니 그럴 만했다. 그러나 중공군 전사(戰史)에 나오는 기록을 보면 최고사령관 펑더화이는 아주 깊은 고민에 빠져 있던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빠른 속도로 전선을 남하시키는 과정에서 입은 손실이 아주 컸기 때문이다.

중공군은 이미 ‘체력’이 바닥을 드러낸 상태였다. 그들은 서울을 점령한 1월4일로부터 나흘이 지난 1월8일 경 중동부 전선의 부대를 제외한 전 병력에게 추격을 멈추라는 명령을 내렸다. 서울을 점령할 때까지 필사적으로 공격을 펼치다가 입은 손실이 매우 컸다는 얘기다. 중공군은 휴식기에 들어갔다. 전선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음은 물론이고, 바삐 쫓겨 내려오던 유엔군과 국군의 입장에서는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매슈 리지웨이는 1950년 12월 26일 한국에 부임했다. 그는 도착 즉시 부산 임시 경무대에 있던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 “중공군을 반드시 격멸하고야 말겠다”고 말했다. 신임 미8군 사령관의 그런 굳건한 모습을 보면서 이승만 대통령은 꽤 위로를 받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직후 이승만 대통령은 이 단호하며 매정한 미 야전 장군의 혹독함에 치를 떤다.
1951년 1월 5일, 1.4 후퇴 당시 서울을 떠나 남으로 향하는 피란민의 행렬./미 국립문서보관소
1951년 1월 5일, 1.4 후퇴 당시 서울을 떠나 남으로 향하는 피란민의 행렬./미 국립문서보관소
리지웨이는 부임 직후 의정부 전선을 시찰했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그는 전선을 지키던 국군이 맥없이 중공군에게 쫓겨 물러나는 장면을 목격했다. 이미 압록강에서 쫓기기 시작해 제대로 반격을 펼치지도 못한 채 후퇴만 거듭하던 국군의 무기력함에 그는 화가 치밀었던 모양이다. 리지웨이는 그 직후 다시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가 “각하가 강력한 지휘력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국군을 지원하지 않겠다”며 강한 불만을 토로했다. 거의 협박수준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런 리지웨이를 매우 괘씸하게 여겼던 듯하다. 그 이후 이 대통령은 리지웨이를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 대통령은 자존심이 강했던 인물이다. 대통령인 자신의 면전에서 싫은 소리를 거리낌 없이 해대는 리지웨이가 편하게 보일 리 없었을 것이다. 리지웨이는 공격적이고 매정했다. 자신이 계획하고 추진하는 일에는 조금의 오차도 허락하지 않는 타입이었다.

병력 섬멸 위주의 리지웨이 공격법

리지웨이는 반격을 시도하면서 전임 지휘관들과는 다른 곳에 주안점을 두었다. 전임 지휘관들이 지역을 많이 확보하는 전략을 구사했다면 리지웨이는 적의 병력을 타격하는데 주력했다. 적에게 최대한의 타격을 가해 병력과 물자, 장비 등을 최대한 많이 섬멸하고 파괴하는 전법(戰法)이었다.
미 해병대 1사단이 설치한 포항의 구호품 배급소에서 옷가지와 신발, 장난감 등을 한두 점씩 받아 든 피란민 아이들. 1·4후퇴 직후인 1951년 2월15일 촬영된 사진이다.
미 해병대 1사단이 설치한 포항의 구호품 배급소에서 옷가지와 신발, 장난감 등을 한두 점씩 받아 든 피란민 아이들. 1·4후퇴 직후인 1951년 2월15일 촬영된 사진이다.
앞에서도 소개했지만, 한국에서 전선을 이끌고 공격에 나선 중공군 최고사령관 펑더화이는 그 누구보다도 당시의 중공군이 지녔던 힘의 한계를 절감한 인물이다. 그는 베이징에 돌아가 전선 상황을 마오쩌둥에게 설명하기 전에도 이런 문제점을 보고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병력 손실이 매우 크고, 전선의 연장으로 보급이 크게 부족하다는 점과 동상자(凍傷) 등 질병으로 인한 병사들의 사기(士氣) 저하 등도 언급했다.

그러나 중국 수뇌부는 한반도 전쟁 참전 성과에 도취해 있었던 듯하다. 특히 청천강 유역의 군우리 등 지역과 동부 전선의 장진호 전투에서 미군을 격파했다는 점을 매우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자국군이 세계 최고라는 자만에 젖어 중립국과 서방 국가들이 제안하는 휴전 방안을 드러내놓고 무시했다. 1951년 1·4 후퇴 직후의 상황이었다.

1·4후퇴는 서울과 인근 지역의 220만 명에 달하는 피란민, 그리고 전국적으로는 700만 명이 넘는 남부여대(男負女戴)의 대열을 낳았던 사건이다. 유엔군과 국군은 서울을 다시 내줌으로써 깊은 좌절감에 빠져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국군 일부에는 ‘계속 중공군이 남하해 공격을 벌여온다면 그저 물러날 수밖에 없다’는 패배의식이 팽배해 있었다.
6·25 당시 미군 탱크를 방망이 수류탄으로 공격하는 중공군 특공대.
6·25 당시 미군 탱크를 방망이 수류탄으로 공격하는 중공군 특공대.
그런 분위기를 일신한 주인공은 역시 리지웨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이승만 대통령에게는 ‘버르장머리 없이’ 싫은 소리를 마구 해대기는 했지만, 공격적이고 단호한 그의 면모는 당시 전선 상황에서 아군에게 매우 절실한 요소였다.

당황한 펑더화이, “서울만은 사수”

펑더화이가 자군 병력에게 추격 정지 명령을 내려 중공군은 잠시 휴식기에 들어갔음에도 중부 전선은 위태로웠다. 서부전선에는 미군이 버티고 있었으나 중동부 전선의 주요 지역에는 국군이 지키고 있었다. 중공군은 전반적인 공세를 잠시 멈췄음에도 그 지역만큼은 모질게 파고들었다. 강원도 원주가 불안한 상태에 빠졌다. 중공군은 그곳을 돌파해 아군의 후방으로 우회하려는 전략을 구사하는 듯했다.
구소련의 스탈린과 북한 김일성 초상화 부근에서 총격전을 벌이고 있는 유엔군 병사들./ 춘천박물관 제공
구소련의 스탈린과 북한 김일성 초상화 부근에서 총격전을 벌이고 있는 유엔군 병사들./ 춘천박물관 제공
그곳의 중공군 돌파구를 점차 축소하는 데 일단 힘을 모았다. 미군은 리지웨이의 지시에 따라 그곳으로 병력을 집중해 일단 원주의 돌파구가 커지는 상황을 막았다. 1월12일 무렵이었다. 그 후로는 이상하게도 모든 전선에서 중공군이 사라졌다. 새로운 공격을 시도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리지웨이는 위력수색을 시도했다. 위력수색은 적의 병력이 어느 정도, 그리고 어떤 모습으로 버티고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펼치는 수색작전의 하나였다. 강력한 화력을 지닌 대규모 병력을 출동시켜 적이 먼저 아군을 향해 공격을 벌이도록 유도하면서 상대의 병력 배치, 화력 규모 등을 알아보는 작전이었다.

서울 이남까지 펼쳐진 그 위력수색의 결과, 중공군의 대규모 병력은 서울 이남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했다. 그에 따라 리지웨이는 전선을 북상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아울러 그는 각급 부대에게 적의 병력과 물자에 최대한의 타격을 가하라고 지시했다. 지역의 확보는 둘째였고, 우선은 날카로운 공격으로 적의 희생을 극대화하라는 지시였다.

베이징에 있던 마오쩌둥은 춘계공세 준비를 명령했다. 2~3개월 집중적으로 유엔군과 국군을 밀어붙이면 전쟁을 승리로 끝낼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물론, 그 배경에는 참전 초반 2개월에 걸친 공세와 승리로 인한 자신감이 깔려 있었다. 하지만 펑더화이의 고민처럼 중공군은 이미 병력과 물자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2월 들어서면서 유엔군과 국군의 반격이 가시화했다. 중공군은 서울을 내주지 않기 위해 총력전을 펼쳐왔다. 서부전선에서는 전략적 요충을 차지하기 위한 피의 혈전이 이미 예고된 상태였다.

<정리=유광종, 도서출판 ‘책밭’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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