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 김수영 "나는 (박)인환을 가장 경멸한 사람이었다"…시대의 라이벌 김수영과 박인환

입력 : 2013.12.20 15:10 | 수정 : 2013.12.20 22:13

"김수영 안의 박인환을 꺼내라"

김수영 문학관이 지난 11월 27일 서울 도봉구에서 문을 열었다. 이 문학관은 김 시인의 누이동생 김수명(79)씨가 앞장서 조성했다 .동생 김수명씨는 오빠가 일각에서 잘못 알고 있는 것처럼 민중시인이나 참여시인이 아니라 그냥 시인이었다고 했다. 김 시인과 같은 시기 사람들의 인기를 끌었던 시인으로 박인환 시인이 있다. 박 시인도 그저 그런 통속시인 정도로 저평가되고 잘못 알려진 시인이라는 평이 있다. 두 시인은 라이벌이었다. ‘명동의 백작’으로 불린 박 시인은 먼저 세상을 떠난 존경하는 시인 이상(箱·1910~1937)을 기리며 3일 연속 술을 마시다 숨졌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낭만적이었다. 박인환 문학관은 1년 전인 작년 10월 그의 고향 강원도 인제에서 문을 열었다. 문학평론가인 한양대 유성호 교수가 김수영 문학관 개관을 계기로 두 시인의 라이벌 관계를 재조명했다./편집자 주

김수영(金洙暎·1921~1968)은 현대문학사에서 독자적인 신화적 공간을 구성하고 있는 드문 예에 속한다. 그는 서정주와 더불어 후대 시인들에게 가장 광범위한 영향을 끼친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고, 문학사의 전환기마다 당대적 의미로 소급되어 재해석되는 등, 자기 권역을 풍요롭게 구축한 시인이다. 반면 동시대에 함께 활동했던 박인환(朴寅煥·1926~1956)은 몇몇 낭만적 시편을 쓴 요절 시인으로 남아, 김수영의 감염력이나 문제성에는 현저하게 못 미치는 위상을 확보하고 있다. 하지만 박인환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 인상을 가장 첨예하게 각인시킨 장본인은 정작 김수영이었다. 김수영은 박인환 사후 여러 산문에서 박인환을 거세게 몰아붙였는데 그 실례들을 읽어보자.

복쌍(박일영이라는 화가-인용자 주)은 인환에게 모더니즘을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 예술가의 양심과 세상의 허위를 가르쳐주었다. 그는 ‘마리서사’라는 무대를 꾸미고 연출을 하고 프롬프터까지 해가면서 인환에게 대사를 가르쳐주고 몸소 출연을 할 때에는 제일 낮은 어릿광대의 천역을 맡아가지고 나와서 관중과 배우들에게 동시에 시범을 했다. 인환은 그에게서 시를 얻지 않고 코스츔만 얻었다.(산문 「마리서사」, 1966.)
시인 김수영. 눈 빛이 형형하다.
시인 김수영. 눈 빛이 형형하다.
“나는 인환을 가장 경멸한 사람의 한 사람이었다. 그처럼 재주가 없고 그처럼 시인으로서의 소양이 없고 그처럼 경박하고 그처럼 값싼 유행의 숭배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죽었을 때도 나는 장례식에를 일부러 가지 않았다. (중략) 인환! 너는 왜 이런, 신문기사만큼도 못한 것을 시라고 쓰고 갔다지?”(산문 「박인환」, 1966.)

김수영, “그(박인환)가 죽었을 때 나는 장례식에 안 갔다”

박인환 사후 10년 만에 씌어진 글들에서 김수영은 박인환에게 주홍글씨와도 같은 낙인을 찍는다. 이러한 김수영의 경험적 기억들은 후대의 기억 속에 박인환을 시종 ‘겉멋’, ‘경박함’, ‘딜레탕티슴’, ‘포즈’ 등의 수식어로 표상하게끔 하였다. 그만큼 김수영은 박인환이 종로 한 모퉁이에서 경영하던 ‘마리서사’라는 아름다운 이름의 서점에서 “박일영 김병욱 같은 좋은 시우(詩友)를 만나게” 되었지만 “인환의 모더니즘은 벌써부터 불신”(산문 「연극하다가 시로 전향」, 1965.)하고 있었다고 줄곧 증언해온 것이다. 결국 그 믿을 수 없는 모더니스트 박인환은 ‘시’는커녕 ‘코스츔’만 보여주다가 사라져간 것이다.
시인 박인환. 눈빛이 우수 짙어 보인다.
시인 박인환. 눈빛이 우수 짙어 보인다.
그렇다면 김수영은 왜 그토록 박인환을 심하게 경멸 혹은 경원했던 것일까? 몇몇 진단이 있다. 먼저 박인환은 영화배우 이상의 용모를 가진 시인이었다. 당시 배우들과 나란히 명동을 거닐어도 여인들 눈길이 그에게 머물렀을 정도였다. 미남형 얼굴에 키가 컸고, 무슨 옷을 입어도 멋이 넘쳤다. 그리고 성격적으로도 박인환은 거칠 것이 없었다. 김수영은 이런 점에서 도저히 그를 따라갈 수 없었다.

또한 박인환은 1948년 스물셋에 진명여고 출신의 이정숙과 결혼하였고, 김수영은 1950년 서른에 이화여전 출신의 김현경과 결혼한다. 시집은 두 사람 모두 한 권을 냈는데, 박인환이 <박인환선시집>(산호장, 1955)을 냈고, 김수영은 <달나라의 장난>(춘조사, 1959)을 뒤따라 냈다.

1921년생 김수영이 1926년생 박인환에게는 다섯 살 터울의 형뻘이었지만, 김수영은 박인환보다 결혼은 2년 늦게 첫 시집 상재는 4년 늦게 한 것이다. 이처럼 김수영은 어린 박인환에게 모든 것이 뒤처졌다. 시인으로의 각광은 물론 세속적인 성공에서도 늘 타이밍이 늦었다. 이런 일련의 일들이 김수영에게 열등감이나 콤플렉스를 가져다주었을 것이라는 판단은 문단 여기저기 횡행해왔다.

박인환, 독설로 김수영 면박

또한 김수영이 포로수용소에서 나와 박인환 시를 읽고 그 가운데 한 단어가 낯설다고 하자 박인환은 “이건 네가 포로수용소 안에 있을 동안에 생긴 말이야.”라고 독설 반 농담 반 하면서 김수영에게 면박을 주기도 했다는 삽화를 얹는다면, 박인환의 날렵함과 재치를 추월할 수 없었던 김수영이 박인환에게 느꼈을 피해의식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김수영의 대표작 '풀'
김수영의 대표작 '풀'
하지만 김수영의 박인환 공격이 전적으로 틀렸다고만은 할 수 없다. 일찍이 해방 직후에 전위적 모더니스트로서 참신하게 출발했던 박인환은, 전쟁과 가난을 겪으면서 초기 시편에서 거칠게나마 보여주었던 사회적 관심들을 탈각하고 도회적 센티멘털리즘의 세계로 급격하게 경사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퇴행적 변모를 두고 김수영이 ‘코스츔’이라고 비판했을 수 있었을 것이다. 분명 부정적 과장이 개입하기는 했지만, 1966년 당시의 김수영으로서는 박인환에 대한 이러한 저평가가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박인환과 김수영이 얼마나 대조적인지를 보여주는 장면들도 있다. 박인환은 1930년대에 나온 일본의 호화판 시집들을 어느 페이지 하나 손때가 묻지 않게 유산지나 셀로판지로 싸서 정성껏 보관했으며 잡지 같은 것도 함부로 다루지 않았다. 그 점에서 그는 책의 퓨리턴이었다. 그 퓨리턴이 정성스레 지은 책사가 바로 ‘마리서사’였을 것이다. 반면 김수영은 자기 책이건 남의 책이건 읽으면서 낙서나 언더라인을 치고 책장을 접어 헌 책으로 만드는 것으로 자신의 정력적인 독서력을 보여주었다.
박인환의 대표작 목마와 숙녀 일부가 적힌 시비(詩碑).
박인환의 대표작 목마와 숙녀 일부가 적힌 시비(詩碑).
그리고 시집 후기도 재미있는데, 박인환이 “아내 정숙에게 보낸다.”라고 쓴 데 비해, 김수영은 복쌍 박일영의 본명인 “박준경 형에게 드린다.”라고 썼다. 자신들의 시적 연원을 각각 ‘사랑하는 아내’와 ‘존경하는 선배’에 둔 그들의 태도 역시 대조적이다.

라이벌 관계란 상극과 상생이 공존

원래 라이벌(rival)이란 ‘강(river)’에 연원을 둔 말로서 ‘강가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뜻을 품고 있다. 치수권이 중요했던 농경 사회에 강을 사이에 둔 사람들은 서로 경쟁하고 싸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물이 말라버리면 물을 대기 위해 협력해야 했다. 라이벌이란 이렇게 상극과 상생을 함께 하는 존재들이다. 또한 평소에는 친하게 지내지만 생존이 걸린 문제에 들어서면 냉혹한 경쟁자가 되는 것이 라이벌이다.

그 점에서 김수영과 박인환은 글자 그대로의 ‘라이벌’은 아니었다. 그 하나는 김수영은 박인환을 꽤 의식했지만, 박인환은 김수영에 대해 전혀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박인환이 유명을 달리 한 후에 김수영은 그야말로 뚜벅뚜벅 자신을 개진해가면서 박인환 없는 12년을 현대문학사의 거인으로 커갔기 때문이다. 결국 박인환은 멈추어버렸고 김수영은 흘러갔기 때문에, 그들은 상극과 상생을 결속한 의미의 라이벌이 될 수는 없었다.

우리는 어쨌든 박인환에 대한 기억을 김수영의 독설에 가까운 부정적 증언에 의해 각인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박인환이 더 살아서 김수영을 증언할 기회가 있었다면 무어라고 했을까? 생애가 뒤바뀌어 김수영이 서른하나까지 박인환이 마흔여덟까지 살았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모두 부질없는 가정이지만 김수영이 31세에 생을 멈추었다면 그것은 박인환의 그것보다 훨씬 초라한 것이었을 터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박인환의 30 생애가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었을지라도 결코 가볍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수영에게 60년대가 통째로 주어졌듯이 박인환에게도 4․19 경험이 주어졌고 60년대의 자기 갱신의 기회가 주어졌다면 아마도 그는 지금의 ‘코스츔’ 평가를 훌쩍 넘어섰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김수영 기억 안의 박인환을 꺼내서, 박인환 스스로 가졌던 가능성과 그 변형 과정을 그가 살았던 시대와 견주어 재구성해야 한다. 여전히 우리에게 박인환은 안타깝게 갑자기 멈추어버린 미완의 텍스트요, 김수영은 스스로의 갱신으로 에너지틱하게 솟구친 완결의 텍스트다.
유성호 한양대 교수
유성호 한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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