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3.12.11 16:39 | 수정 : 2013.12.12 10:53
우젠슝(吳健雄)은 아시아를 대표하는 세계적 여성과학자로 ‘중국의 마리 퀴리’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작년 ‘마담 우’라고도 불리는 우젠슝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중국을 포함해 대만, 미국 등지에서 추모 행사로 떠들썩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마담 우” 우젠슝
“마담 우” 우젠슝
1957년 젊은 중국계 물리학자인 양전닝과 리정다오의 전격적인 노벨물리학상 수상 배후의 일등공신은 바로 마담 우였다. 그녀는 미국물리학회가 “사상 최고의 실험 물리학자”라고 언급할 정도로 탁월한 방사성물리의 전문가였다. 그녀는 홀짝성이란 대칭성이 깨짐과 관련된 두 젊은 물리학자의 혁명적 이론을 증명해줄 ‘우 실험’을 디자인했다. 이 실험에서 방사능 물질인 코발트를 극저온에서 냉각시키고 자기장을 걸어주었더니, 놀랍게도 원자핵의 붕괴시 대칭성이 깨진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발견에도 불구하고 마담 우는 노벨상을 타지 못했다. 이를 두고 양전닝 교수도 “마담 우가 빠진 것은 정말 미스터리였다”고 회고했다.

노벨상은 놓쳤지만 새로 제정된 권위있는 울프상의 첫 수상자로 선정된 마담 우는 여러 모로 물리학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녀는 프린스턴대 물리학과 최초의 여성교수, 맨해턴 프로젝트에 참여한 유일한 여성과학자, 미국 과학한림원에 입성한 첫 중국계 미국인, 프린스턴 대학의 명예박사학위를 받은 첫 여성, 미국물리학회의 첫 여성회장이 되었고, 생전에 소행성에 이름이 명명된 첫 과학자의 영예도 누렸다.

마담 우의 아버님은 일찌기 지역 여학교의 설립자이자 운영자로서 열린 사고방식으로 어릴 때부터 딸의 교육에도 남달리 힘써왔다. 따라서 마담 우는 여성 차별적인 환경에서 불구하고, 상하이의 명문 중국공학과 난징의 국립중앙대학에서 수학했다. 한편 그녀는 고교시절 연모했던 후스 교장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후스 교장은 조기전문교육보다 ‘문리의 소통’을 중시해 이과생들은 문학과 역사를 철저히 배워야 했고, 문과생들은 자연과학 과목을 반드시 이수해야만 했다. 따라서 인문학적인 소양도 풍부했던 우젠슝은 노벨상 수상자 양전닝과 다른 과학자들에게도 인문학의 중요성을 항상 강조하며 많은 영향를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은 마담우가 근대 중국의 “비운의 야심가”인 위안스카이 (원세계 袁世凱)의 손자며느리이며, 남편의 친할머니가 한국인이라는 것이다. 위안스카이는 중국의 군인이자 정치가로 19세기 말 우리나라에 부임해 내정·외교를 간섭하고 일본, 러시아와 경쟁했던 인물이다. 그는 1882년 임오군란 진압차 왔다가 1894년 청일전쟁으로 패퇴할 때까지 조선에 지내다 세도가인 안동 김씨를 첩으로 맞았다. 그가 청나라로 귀국할 때 김씨와 몸종 2명이 함께 수행했는 데, 이들을 모두 첩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나이순으로 위안스카이의 세 째 첩이 된 안동김씨는 우울한 나날을 보냈지만, 둘째 아들 위안커원(袁克文)은 위안스카이의 총애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부친의 황제 즉위에 용기있게 반대해 잠적해버리기도 하였다. 이 위안커원의 셋째 아들이 바로 마담 우의 남편이자 세계적 물리학자였던 위안자류(袁家騮) 박사이다. 위안자류는 할아버지의 정치경력 때문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어렸을 때부터 과학교육을 받았다. 그는 마침 영국의 캠브리지 대학교에서 초빙된 하트박사의 물리학 수업을 듣고 물리학에 매료되었다. 그는 1936년 미국 버클리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캘리포니아공대에 재입학해, 1923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저명한 물리학자인 밀리칸 교수의 지도학생으로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박사학위를 땄다.
위안스카이와 안동김씨와의 소생인 위안커원
위안스카이와 안동김씨와의 소생인 위안커원
처음엔 미국 동부의 미시간대 유학을 꿈꾸던 우젠슝은 1936년 서부 캘리포니아 방문시 운명적으로 위안자류를 만나 버클리대학교로 진학하기로 결정한다. 1942년 두 물리학자가 세기의 결혼식을 올렸을 때 바로 밀리칸 교수가 주례를 서게 되었다. 그의 주례사는 “두 분은 오늘 이후 살아가시면서 실험이 첫째요, 생활이 두 번째인 삶을 사세요“라고 당부하는 내용이었다. 두 부부는 1997년 마담 우의 타계까지 55년간 실제로 세계적 물리학자 부부로서 또한 화목한 잉꼬부부로서 모범적인 삶을 살았다.

위안자류의 마지막 소원은 ‘우젠슝-위안자류 과학강좌기금회’, ’우젠슝기념관‘, ’밍더학교‘ 등 부인을 기념하는 것이었다. 2003년 위안자류도 세상을 떠나 두 부부는 중국 장수성 타이창시에 소재한 밍더학교 교정에 함께 누워있다. 두 사람은 평소 이 학교에서 자신들처럼 어릴 때부터 학생들에게 과학적 사고와 학습을 고취시켜주기 위해서 노력해왔다고 한다.
주은래를 만나는 우젠슝과 위안 쟈리우 부부. 위안 쟈리우는 위안스카이와 안동김씨의 손자이다.
주은래를 만나는 우젠슝과 위안 쟈리우 부부. 위안 쟈리우는 위안스카이와 안동김씨의 손자이다.
비록 노벨상은 받지 못했지만, 위안스카이의 손자며느리인 마담 우는 전쟁의 소용돌이속에서 아시아여성으로서 불리함을 극복하고 시대를 앞서는 세계적인 물리학자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이 ‘세기의 부부’의 아들 위안웨이청(袁緯承)도 부모의 뒤를 이어 물리학자가 되어 미국 로스알라모스 국립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재직했다.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이 물리학자 가계의 굴곡의 역사는 가슴 아프지만 새겨야할 우리 역사이기도 하다.
타이창에서 우젠슝 100주년 기념연설을 하고 있는 아들 위안웨이청.
타이창에서 우젠슝 100주년 기념연설을 하고 있는 아들 위안웨이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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