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3.12.10 15:00

묘사로 끝내도 충분한 대목에 필자의 해석을 덧붙이는 건 대부분 군더더기
'슬프다' '어이없다'고 쓰는 대신 독자가 스스로 그렇게 느끼게 써야 좋은 글

기자 초년병 시절, 조선일보 사회면 톱 기사 한 편을 읽다가 감동받아 눈물이 핑 돌았던 적이 있습니다. 88장애인올림픽 개막식장에서 마지막 성황 봉송자로 휠체어에 앉아 트랙을 행진했던 장애 여성과, 그 휠체어를 힘겹게 밀었던 6살 난 딸 보람이의 스토리였습니다. 보람이가 가쁜 숨 몰아 쉬며 엄마의 휠체어를 밀기까지 두 모녀의 사연과, 모녀의 ‘깜짝 등장’에 탄성을 쏟으며 한 마음으로 ‘으쌰 으쌰’ 힘 보태던 6만 관중의 표정을 엮은 기사는 전국의 독자들을 아침부터 울게 만들었습니다.

모녀의 감동적 행진은 전날 대부분 TV 중계로 지켜 봤습니다. 그런데도 다음날 신문이 어떻게 온 국민을 또 울렸을까요. 우선, 중계 때는 미처 알려지지 않았던 모녀의 특별한 사연들을 취재해 현장 스케치에 잘 녹여냈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보람이 엄마가 딸을 임신했을 때 ‘ 산모까지 위험할 수 있으니 중절하는 게 좋겠다’는 의사 권유도 뿌리치고 낳았다는 대목은 가슴 저릿하게 합니다. 이런 대목 마다 ‘목숨 걸고 낳은 딸’ 같은 인상적 표현도 놓치지 않았습니다. “나 힘들지 않아요. 엄마, 손을 흔드세요” 처럼, 잘 추려내 문자화한 소녀의 육성은 육성 자체를 들었을 때보다도 더 강렬하게 읽는 사람 마음을 흔드는 법입니다. 불필요한 수식어나 접속사 따위를 생략하고, 감정을 절제한 글쓰기 솜씨가 기사에서 빛납니다.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은 마지막 대목은 군더더기 없는 글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보람이가 세 살적 어느 날 “엄마 업어 줘”하고 말했을 때 조씨는 “엄마는 널 업어줄 수 없단다”라고 말했다. 그날 이후 단 한 번도 엄마에게 업어 달라고 칭얼대지 않았다는 보람이의 꿈은 의사가 되는 것이다.>

만일 마지막 문장을 <보람이의 꿈은 의사가 되어 엄마의 병을 고쳐 주고, 엄마 같은 처지의 장애인들을 치료해 주는 것이다.>라고 썼다고 합시다. 얼마나 맥빠졌을까요. 엄마의 장애를 안타까와 하며 자란 소녀가 장래의 꿈을 굳이 의사로 정했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웬만한 사람들은 그 소녀 마음을 바로 알아차립니다.그리고 감동합니다. 이런 대목에 붙이는 설명이란 구차한 군더더기가 되어 글의 힘을 오히려 떨어뜨립니다.

프로야구 열성팬들은 중계로 게임을 모두 지켜봤어도, 다음날 아침 신문이 오면 기사를 찾아 읽습니다 경기 결과를 알려고 보는 게 아닙니다. 글을 통해 경기를 반추하는 재미를 맛보려는 것입니다. 잘 쓴 문장의 좋은 표현들은 어렴풋했던 모든 것들에 또렷하게 의미를 부여합니다. 손에 땀을 쥐는 드라마틱한 순간들을 묘사한 글을 읽는 건, 그 드라마를 눈으로 보는 것과는 또 다른 재미를 줍니다. 영상미디어 시대라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살아있는 글의 힘입니다. 그 힘은 잘 쓴 글에서 나옵니다. 특히 군더더기 없는 글이라야 읽는 이에게 강한 정서적 울림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학생들 중에는 글 속에 안 해도 좋을 해석을 굳이 덧붙이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다음 문장을 봅시다.

<태극기를 꽂은 자전거를 타고 행진하는 행사는 3.1절을 기념하기 위해 열렸다. 자전거 동호인들과 가족 등 남녀노소가 참가하여 선열들의 정신을 되새김으로써 그 의미가 더욱 컸다.>
<그 장관은 취임한지 1개월 만에 비리에 연루되어 사퇴하는 불명예를 안았다.>

위의 글에서 밑줄 친 ‘그 의미가 더욱 컸다’’불명예를 안았다’같은 표현이 꼭 필요할까 생각해 봅시다. 굳이 그렇게 쓰지 않아도 사실 묘사만 읽으면 독자 스스로 의미가 크거나, 불명예스런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밑줄 친 부분들은 삭제하는 편이 낫습니다.

글쓰기에서의 절제란 연극·영화 배우들에게 요구되는 절제된 연기의 미덕과도 통합니다. 슬픈 장면에서 주인공이 먼저 울어서 관객을 따라 울게 하는 연기보다는, 주인공은 끝내 울음을 참는데 그 슬픔의 크기를 관객 스스로 더 뼛속깊이 느끼게 하여 울리는 연기가 한 차원 높은 연기입니다. 코미디에서도 자신은 전혀 웃지 않으면서 관객이 배를 잡고 뒹굴게 하는 게 코미디 고수입니다.

안 해도 좋을 말을 과감하게 생략한 글이 왜 더 큰 울림을 주는 것일까요. 독자 스스로 느끼고 판단할 몫을 남겨 놓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글 쓴 사람이 이렇게 느껴라 저렇게 생각하라고 답을 주는 건 때론 과잉친절입니다. 읽는 사람이 가슴으로 머리로 스스로 느끼고 생각하는게 마음 속에 훨씬 강한 울림이 됩니다.

<방범회사 직원이 남의 집에 침입해 금품을 훔쳤다.>는 문장과 <방범회사 직원이 절도를 저지르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발생했다>는 문장 중 어느것이 더 좋은 표현일까요. 명료하고 간결하게 사실 전달에 충실한 앞의 문장이 깔끔하지 않습니까. 사실만 읽어도 읽는 사람 마음에 ‘어처구니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에 붙인 해석은 군더더기일 뿐입니다.

절제의 미덕을 보여주는 에세이의 한 대목을 읽어 봅시다. 소설가 김훈의 저서 ‘자전거 여행’ 중 ‘망월동의 봄’이라는 글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광주민주화운동 때 계엄군에게 폭행을 당한 여성과 그의 딸 이야기입니다.

“이추자씨는 그때 임신 3개월인 신부였다. 집 안에서 총을 맞았다. 오른쪽 눈 밑을 총알이 뚫고 지나갔다. 병원에서 수술받던 도중에 폭도로 몰려 병원 지하실에 끌려가 군인들한테 매를 맞았다. 이추자씨는 그때 아무런 정치 의식이 없었고, 그 상황이 무슨 상황인지도 몰랐다고 한다. 다만 태아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동그랗게 꼬부리고 매를 맞았다. 기형아를 낳으면 안된다는 생각뿐이었다고 한다. 군인들이 임신한 배를 구둣발로 찼고, 이씨는 여러번 실신했다. 이 아이가 최효경이다. 광주여자대학교 무용과 2학년이다. 핸드폰에 코알라 인형을 씌워서 들고 다닌다. ”

단문의 매력을 잘 살린 글입니다. 88장애인올림픽 보람이 모녀 기사처럼, 마지막 대목의 함축미 있는 표현이 글 전체를 살렸습니다. 만일 마지막을 <광주여자대학교 무용과 2학년이다. 엄마 뱃속에서 겪은 그 아픔도 잊은 채 구김살 없이 자라났다.핸드폰에 코알라 인형을 씌워서 들고 다니는 전형적인 요즘 여대생이다.> 고 썼다면 힘있고 깔끔한 글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글을 한 번 쓴 다음엔, 하지 않아도 좋은 말은 없는지 살펴봅시다. 그리고 그런 군더더기가 있다면 삭제합시다. 생략은 원고지를 아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절제하면 할수록 더 큰 설득력을 갖는 글, 더 힘있는 글이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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