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3.11.23 07:40
1897년 5월 23일 중국 사신을 맞던 모화관(慕華館)은 독립관으로 환골탈태했다. 태극기와 함께 황태자의 친필 현판도 내걸렸다. 오욕의 상징물이 거듭난 그날, 회원들은 매주 일요일 오후 3시에 독립관에서 강론회를 열기로 뜻을 모았다. 새로운 지식의 전수(傳受)와 열띤 토론이 벌어진 그곳에서 갓과 학모(學帽)를 쓴 양반과 학동들은 모든 인간이 동등하다는 민권(民權) 사상, 황제도 법에 따라야 한다는 법치주의, 그리고 자주독립을 꿈꾸는 주권 수호 사상을 가슴에 품게 되었다. 사회철학자 하버마스(J. Habermas)는 말한다. "서구에서 부르주아 계급이 근대라는 새 시대를 열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신문을 무기 삼아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하는 '공중(public)'으로 진화했으며, 정치 헤게모니를 잡을 수 있는 '공론장(Public sphere)'을 열었기 때문"이라고. 그렇다면 '독립신문'을 발간한 독립협회의 강론회는 '공론장'이었으며, 거기 모인 이들은 최초의 '공중'이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정치 헤게모니를 잡지 못했을까?

모화관이 독립관으로 다시 열리던 날 이를 축하하기 위해 모인 독립협회 회원들. 멀리 보이는 산이 안산, 지금의 무악산이다.
모화관이 독립관으로 다시 열리던 날 이를 축하하기 위해 모인 독립협회 회원들. 멀리 보이는 산이 안산, 지금의 무악산이다.
"부르주아 없는 민주주의는 없다." 역사사회학자 배링턴 무어(B. Moore)의 유명한 명제다. 1898년 입헌군주제를 요구해 황제와 길항(拮抗)이 빚어지자 양반 관료들은 협회를 탈퇴했다. 학생이 주축이 된 독립협회 회원들은 '공론장'을 박차고 나와 종로 가두(街頭)에서 만민공동회를 열었지만, 보부상 단체 황국협회의 무력 진압으로 독립협회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양반 관료들은 신분을 잃지 않으려 했으며, 특권상인 보부상들도 부르주아로 진화하기보다 전제 황권을 지키는 수문장 되길 택했다. '공중'으로 거듭나지 못한 백성은 근대의 문을 스스로 열지 못했고, 국민의 힘이 아닌 외세에 기대 왕조를 지키려던 황제는 채 10년이 못 되어 국권을 앗기고 말았다.

광복 후 우후죽순처럼 돋아난 '공론장'도 변혁을 이끌어 내지 못하긴 매한가지였고, 21세기 지식 정보화 사회를 맞아 SNS(Social Networking Service)가 만들어낸 새로운 '공론장'이 열렸지만, 도심의 가두와 광장은 여전히 권리만 주장하는 구호와 깃발이 그득하다. 권리만이 아닌 책무도 아는 '공중' 되기가 더없이 필요한 오늘이다.

허동현 | 경희대 한국현대사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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