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3.11.12 05:45

편안하게 책상에 앉아서는 심신이 가라앉아
걷거나 일어서면 생각 잘 풀린다
화장실에서 아이디어 떠올린 사람도 많아
베토벤도 아침 산책하며 악상 떠올려

글 쓰기의 첫 단계는 무엇일까요. 관련 자료를 찾아 보면서 글에 담을 내용을 취재하는 게 사전 준비라면, 본격적 글 쓰기는 구상(構想)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무엇을 어떻게 써야할지 머리 속으로 떠올리는 일이 구상이죠. ‘학교 폭력,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식의 작문 숙제를 하든, ‘우리 강아지’란 제목으로 수필을 하나 쓰든, 가장 먼저 넘어야 할 산은 구상을 마치는 일입니다. 수십 년 간 직업적으로 글을 쓰고 있는 저에게도 무엇을 쓸 것인지를 고민해야 하는 구상의 과정이 제일 힘든 시간입니다.

컴퓨터 화면을 켜 놓고 멀뚱멀뚱 글 내용을 구상하는 사람보다는 부지런히 키보드를 두드려대는 사람이 뭔가 열심히 쓰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꼭 그런 건 아닙니다. 어떻게 쓸 것인가를 머리 속으로 짜내고 있는 사람이 더 힘들게 글을 쓰고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문화부 기자 시절, 마감 시간은 다가오는데 제 컴퓨터 화면은 허옇게 비어있던 때가 있습니다. 데스크가 “기사 빨리 써 내야지”하고 독촉합니다. 화면 앞에서 구상을 하던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네, 지금 열심히 쓰고 있고요, 거의 다 써갑니다. 출력만 하면 됩니다.” 글을 구상하는 일이 머릿 속에 한 글자 한 글자 쓰는 작업이라면, 자판을 두드려서 글을 완성하는 작업은 ‘출력’이라고 여긴 겁니다.

구상은 글의 성패를 좌우하는 핵심적인 과정입니다. 이 ‘큰 그림’을 잘 그려야 좋은 글을 쓸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충분한 구상도 하지 않고 일단 첫 줄부터 쓰는 사람이 꽤 많습니다. 조선일보가 개설한 ‘학생기자 아카데미’에서 가르칠 때 만난 학생들도 그랬습니다. 작문 과제를 하나 내고 글을 쓰라고 하면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은 곧바로 사각사각 연필을 움직이며 원고지를 메우기 시작합니다.

물론 무엇이라도 첫 문장을 적어놓으면 이 만큼 썼다는 안심이 될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전체의 설계가 부실한 채 시작한 글은, 쓰다가 문제가 생기기 쉽습니다. 첫 문장을 남보다 빨리 쓴 학생들의 경우, 쓰는 도중에 다른 문장을 새로 끼워넣는 대수술을 하느라 낑낑대며 시간을 오히려 지체하는 경우도 많이 봤습니다.

구상을 할 때 가장 유념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논설문이라면 생각을 체계적으로 정리해야 할 것이며, 수필이나 시 처럼 문학적인 글이라면 어휘와 표현을 고민해야 합니다. 어떤 문인은 “원고지를 앞에 놓고 글을 구상하려고 하면 머리 속 공간에 수많은 어휘들이 빠르게 마구 날아다닌다. 그 중에서 맘에 드는 걸 낚아채는 과정이 나의 구상이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같은 마음의 활동 못지 않게, 글을 구상하는 사람의 ‘몸의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글을 구상할 때 책상에 가만히 앉아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십시오. 그리고 걷거나 몸을 움직이면서 머리를 회전시켜 보십시오. 훨씬 더 생각이 잘 풀릴 것입니다. 이건 20여 년 간 글쓰는 일을 직업으로 삼으면서 깨닫게 된 체험적 진실입니다. 일종의 ‘영업 비밀’인데 여러분께 특별히 알려드립니다.

글을 쓴다고 책상 앞에만 가만히 앉아 있으면 구상이 잘 되던가요. 저의 경우 쓸데없는 게임을 하거나 인터넷 서핑을 하며 시간을 낭비하기도 합니다. 잘못하면 잠이 살살 오기도 합니다. 몸이 편안하기 때문에 심신(心身)이 가라앉아 일종의 휴식 상태로 돌입한 것입니다. 책상을 박차고 일어나 움직이십시오. 불편한 몸의 자세가 가라앉아 있는 마음을 깨우는 일이 많습니다. 산책이 어려우면 거실을 왔다갔다 해도 좋습니다. 가만히 앉아있을 땐 생각하지 못했던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떠오를 가능성이 많습니다. 빨리 컴퓨터를 두드려 쓰고 싶어질 수도 있습니다.

저의 경우 멋진 첫 문장을 흔들리는 만원버스 속에서 떠올린 적도 있습니다. 심지어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다 재미있는 생각이 갑자기 떠올라 화장지에 메모한 적도 있습니다. 떠오른 아이디어를 놓치지 않으려고 화장실에 메모지와 연필을 준비하고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실제로 사람이 불편한 자세를 취할 때 아이디어를 잘 떠올릴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본 적도 있습니다. 무언가 골똘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사무실에서 일어나 뒷짐지고 왔다갔다 걷는 일이 많은 것도 두뇌를 좀더 활발하게 움직이려는 자연스런 태도인 것이죠.

제가 담배 피우던 시절, 마감 시간은 다가오는데 글이 잘 안 써질 때는 잠시 일어나 흡연실로 갔습니다. 담배를 한 모금 피우다 보면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휴식하면서 담배를 피워서 생각이 풀린 걸로 여겼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가만히 앉아있지 않고 일어나 걷고 움직인 덕택이 아닌가 합니다

위대한 음악가 베토벤도 작곡할 때 피아노 앞에만 앉아있지 않았습니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살던 때, 베토벤은 아침을 먹고 나면 자기 집이 있는 하일리겐슈타트의 오솔길을 산책하며 악상(樂想)을 떠올렸습니다. 그의 호주머니엔 작은 수첩과 오선지와 연필이 들어있었죠. 산책하다가 뭔가 영감이 떠오르면 베토벤은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거나 미친 사람처럼 손을 휘젓기도 하고 종이에 뭔가를 적기도 했다고 합니다.
하일리겐슈타트의 오솔길을 산책하며 작곡을 구상중인 베토벤. 그는 작곡할 때 피아노 앞을 떠나 산책하며 악상을 떠올렸다. 산책길엔 조그만 수첩과 오선지를 꼭 들고 나갔다.
하일리겐슈타트의 오솔길을 산책하며 작곡을 구상중인 베토벤. 그는 작곡할 때 피아노 앞을 떠나 산책하며 악상을 떠올렸다. 산책길엔 조그만 수첩과 오선지를 꼭 들고 나갔다.
노년에 거의 청각을 잃었을 때도 베토벤은 그 숲길을 걸으며 전원교향곡이라는 걸작을 또 만들어냈습니다. 지금 그 길은 ‘베토벤의 산책로’라고 이름 붙여져 있습니다. 전 세계에서 몰려든 수많은 관광객들이 베토벤이 걷던 길을 따라 걸으며 여러 생각들을 합니다.

여러분도 베토벤처럼 걸으며 글을 구상해 보세요. 하일리겐슈타트의 오솔길이 아니면 어떻습니까. 동네 한바퀴를 걷다가도 번득이는 생각이 떠오를지 모릅니다. 베토벤처럼 수첩이나 연필을 번거롭게 준비할 필요도 없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스마트폰 메모장엔 책상 앞에서 미처 떠올리지 못했던 좋은 아이디어와 좋은 어휘들이 한 글자 한 글자 적힐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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