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찰 25시 이 카테고리의 다른 기사보기

    서울 강남에 등장한 '조폭 지망생'…"우린 계보 있는 조폭"

입력 : 2013.11.11 05:20

영화 '넘버3'에 나온 불사파와 비슷

‘조폭(組暴) 지망생’이란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지망생이란 말을 조폭에 붙이는 게 맞는지 모르겠지만, 요즘 경찰에 등장한 말입니다. 직업으로서 조직폭력배를 동경하는 이들을 뜻합니다. 경찰에서 쓰는 공식 명칭은 ‘조폭 추종(追從)세력’입니다. 조폭수사로 잔뼈가 굵은 강력형사들은 이들을 ‘새끼조폭’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최근 조폭 지망생이 심심치 않게 각종 범죄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지난 8일 서울 서초경찰서는 “태국·중국·베트남 등에 지부를 두고 도박사이트를 운영한 혐의로 ‘국제마피아파’ 일당 19명을 검거했다”고 밝히면서, 이 중엔 조폭 추종세력이 포함돼 있다고 말했습니다. 조폭 지망생이 경찰 보도자료에까지 등장한 겁니다. 경찰에 따르면 김모(28)씨 등 4명은 조직 최하부에서 도박사이트 홍보 배너를 띄우는 잡일을 담당했습니다. 계보(系譜)에 등장하지도 않고, 눈에 띄는 활동경력이 없는 말단이라고 최익수 서초서 형사과장은 전했습니다.

“폼나게 산다”는 이유로 조폭 지망생 되다

이들은 잡일만 했지만, 과격한 조폭 지망생도 있었습니다. 지난 3월 살인 미수 혐의로 서울 강남경찰서에 구속된 이모(21), 지모(21)씨 등입니다. 이들은 작년부터 올 초까지 서울 강남 바닥을 휘젓고다니며 내키는 대로 시민을 때리고, 회칼과 알루미늄 배트로 군기(軍紀)를 잡은 조폭 지망생들이었습니다.
지난 3월 구속된 조폭 지망생 이모씨와 지모씨. 온몸에 문신이 가득하다.
지난 3월 구속된 조폭 지망생 이모씨와 지모씨. 온몸에 문신이 가득하다.


서울 강남의 초·중학교 ‘일진’(학교 폭력조직) 출신 5명 정도로 구성된 이들은 학창시절부터 조폭을 선망했다고 합니다. 이들이 조폭이 되려는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별다르게 할 일이 없다”, “폼나게 산다”, “근사하고 멋있다”는 겁니다.

우두머리격인 동갑내기 이씨와 지씨는 어릴 적 이미 등과 가슴, 팔뚝에 빼곡히 문신을 새겼습니다. 일본도깨비·용·호랑이 등 동양적인 소재로 화려하게 그렸습니다. 이들은 문신을 과시하려고 겨울에도 반팔을 입고 다녔습니다.

졸업 이후 어울려 다니며 가끔 용역 회사에 나가서 생활비를 벌던 이씨 등은 작년 3월부터 ‘합숙’을 시작했습니다. 본격적으로 조폭의 길을 걷기로 한 것입니다. 숙소는 서울 강남구 논현동의 한 빌라로 정했습니다.

합숙에 ‘줄빠따’…조폭 흉내

이들은 ‘형님이 숟가락을 들기 전에는 먼저 식사를 해서는 안 된다’는 등 나름 행동강령까지 만들었고, 이를 어길 시 알루미늄 배트 ‘줄빠따’로 기강을 잡았습니다. 카카오톡으로 메시지를 보낼 때도 “형님, 식사는 하셨습니까”라며 조폭 말투를 흉내냈습니다. 이들은 서로 휴대전화 번호를 저장할 때 이름 앞에 ‘F’를 달았는데, 이는 패밀리(식구)의 약어였습니다.

문제는 이들의 행동을 철부지의 치기(稚氣) 정도로 넘기기 어렵다는 겁니다. 이씨 등 2명은 작년 10월 16일 오전 1시 18분쯤 서울 강남대로에서 상대 차량을 운전자를 차도로 끌어내 린치를 가했습니다. ‘감히 끼어들기를 한다’는 이유였습니다. 이들의 마구잡이 폭행으로 피해자는 뼈가 부러지는 전치 4주의 부상을 입었습니다.

이씨와 조직원들은 작년 11월 조직 자금을 마련한다며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 주차된 1억원 상당의 BMW 차량을 훔치고, 서울 강남역 일대에서 스마트폰 장물처리를 한 혐의로 경찰에 구속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집행유예로 출소한 이후에도 논현동 빌라에서 합숙생활을 계속했지만, 잦은 구타를 견디지 못한 조직원 송모(20) 등 3명이 달아나면서 조직이 와해됐습니다.

이씨와 지씨가 다시 경찰에 잡힌 건 지난 3월. 이번에는 도망간 조직원의 행방을 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중학교 후배 2명의 허벅지, 옆구리, 팔, 복부 등을 흉기로 수차례 찔러 중상을 입힌 혐의였습니다. 칼부림 이후 태연히 119에 전화를 걸어 후배들을 실어 보내는 엽기적인 범죄였습니다. “사시미칼(회칼)에 사람이 찔렸다”는 첩보를 입수한 경찰이 논현동 합숙소를 덮치면서 이들이 꿈꾸던 화려한 조폭생활은 물거품이 됐습니다.

경찰도 이젠 조폭 지망생에 대한 우려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말겠지, 하고 넘길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경찰 관계자는 “이들은 행동강령이나 서열이 있는 진짜 조폭은 아니지만, 이대로 놔두면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진짜 조폭으로 커 나갈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살인미수 혐의로 구속된 뒤 “우린 김태촌 존경”

강남의 조폭 지망생들이 존경하는 인물이 있다고 합니다. 지난 1월 심장마비로 숨진 폭력조직 ‘범서방파’ 두목 김태촌(64)입니다. 이씨는 경찰 조사에서 “우리는 지난 1월 김태촌 형님의 서울아산병원 빈소에도 다녀온 (계보가 있는) 조폭”이라고 주장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1997년 영화 ‘넘버 3’에서 배우 송강호가 조직한 ‘불사파’ 조직원들이 경찰에서 “계보 있는 조폭”이라고 주장하던 장면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김태촌의 말년(末年)은 감옥과 병원을 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는 생전에 모두 13차례 소년원과 교도소를 들락거렸습니다. 감옥에서만 20년 가까이 보냈습니다. 오래 기간 복역하다 2005년 출소한 그는 교도관에게 뇌물을 준 혐의로 1년 만에 재수감됐고, 2007년엔 배우 권상우씨를 협박한 혐의로 기소됐습니다. 2006년부터는 당뇨와 저혈압으로 인한 심장질환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2011년 말 서울대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그는 경찰 조사를 받고 있었습니다. 조폭의 말년이 얼마나 비참하고 초라했는지 조폭 지망생들이 알고는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 Copyright ⓒ 조선일보 & 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