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C 아일랜드 인구 급감 '대기근'… 곰팡이병으로 감자 생산 급락한 탓
유럽 연구진, 당시 감자 DNA 분석… 160년만에 미국 곰팡이 변종 밝혀내
單一 품종 재배가 불러온 재앙, 다른 품종 섞어야 전염병 이겨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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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완 산업부 과학팀장
얼마 뒤 아일랜드에는 감자 잎이 검게 변하고 씨알이 썩는 마름병이 들불처럼 번졌다. 먹을 것이라고는 감자밖에 없던 사람들은 속절없이 쓰러져갔다. 아일랜드어로 '고르타 모르(Gorta M�r)'라고 부르는 1845~1852년의 대기근(大饑饉)으로 인구 800만명 중 100만명이 죽었다. 200만명은 식량을 찾아 영국과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지금 아일랜드 인구는 450만명으로 아직도 대기근 이전 수준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영국과 독일 연구진이 160년이 지난 지금 아일랜드 대기근을 부른 범인을 찾아냈다. 학명(學名)이 '파이토프토라 인페스탄스(Phytophtora infestans)'란, 곰팡이와 유사한 단세포 생물이었다. '파이토프토라'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식물 파괴자'란 뜻이다. 연구진은 영국과 독일 식물원에 보관하고 있던 1845~1896년 사이 감자 잎에서 DNA를 뽑아 유전 정보 전체를 해독했다. 'HERB-1'이라는 파이토프토라 변종이 아일랜드 대기근의 원인임을 확인했다. 그전에는 당시 미국에서 감자 마름병을 유발한 'US-1' 변종이 범인으로 지목돼왔다.
감자 마름병은 유럽 제국주의의 신대륙 정복사와 궤를 같이했다. 마름병 곰팡이는 원래 멕시코 톨루가 계곡에서만 창궐하다가 유럽 정복자들을 따라 미국으로까지 번졌다. 그 과정에서 감염력이 훨씬 강해졌다. 이번에 곰팡이의 미토콘드리아 DNA를 분석했더니 1800년대 초 유럽으로 간 변종과 미국 변종으로 나뉜 것으로 밝혀졌다. 미토콘트리아 DNA는 세포핵 DNA와 달리 모계(母系)로만 유전돼 생명체의 계통분화를 알아내는 데 유용한 정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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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지금도 US-1 변종은 매년 60억달러의 경제적 피해를 입히고 있다. 800만명 이상이 먹을 감자가 매년 사라지는 셈. 흥미로운 점은 유럽으로 간 곰팡이는 오늘날 곰팡이처럼 식물의 면역체계를 이겨내는 유전자들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그다지 치명적이지도 않은 곰팡이에 수백만명이 당한 셈이다. 그렇다면 또 다른 범인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수사가 벽에 부딪히면 흔히 동종 전과자를 뒤진다. 이 경우엔 멸종 가능성까지 점쳐지고 있는 바나나다. 야생 바나나는 씨가 있지만 재배종들은 씨가 없다. 대신 감자처럼 덩이줄기를 잘라 심는다. 즉 모든 바나나는 똑같은 복제품인 셈이다. 20세기 초 '그로 미셀' 품종에 이어 오늘날은 '캐번디시' 품종이 전 세계 판매 바나나의 99%를 차지한다. 그렇다 보니 한번 곰팡이 질병이 번지자 바로 멸종 위기에까지 몰렸다.
1840년대 아일랜드도 사정이 비슷했다. 영국 지주(地主) 밑에서 소작을 부쳐 먹던 아일랜드인들은 밀을 다 뺏기자 남은 토지에 단일 품종의 감자를 빼곡히 심을 수밖에 없었다. 단위 면적당 감자는 밀보다 두 배나 많은 인구를 먹일 수 있었다. 최근 미국 연구진의 분석에 따르면 지금도 감자는 가격 대비 영양분이 가장 우수한 채소다.
식물학자들은 아무리 강하고 유전 조건이 우수한 식물이라 할지라도 복제품만 존재할 경우 새로운 질병에 적응할 '짝'이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하다고 본다. 지금보다 약한 곰팡이라도 아일랜드처럼 똑같은 감자가 빈틈없이 심어진 밭이라면 식은 죽 먹기와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아일랜드에 퍼졌던 곰팡이는 20세기 들어 저항력이 있는 감자 품종이 새로 도입되면서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두 작물의 급작스러운 몰락이 가져온 정치적 결과도 비슷했다. 아일랜드인들은 지배국인 영국이 대기근을 수수방관했다고 비판했다. 당장 아일랜드 민족주의에 불이 붙었고, 1919년 독립전쟁으로 이어졌다. 최근까지도 영국이 지배하는 북아일랜드에서는 영국군과 아일랜드 독립주의자들 간 유혈사태가 끊이지 않았다.
미국의 바나나 기업은 중남미에서 곰팡이를 피해 농장을 옮겨다니며 농장 노동자들을 몰아붙였다. 안전할 때 최대 생산량을 올리기 위해서였다. 노동자들은 착취에 항거했지만 기업의 후원을 받는 정권에 학살됐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에는 시청 광장에서 파업을 하던 노동자들이 군인들에게 학살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1928년 볼리비아에서 의료서비스와 화장실을 요구하며 일어난 바나나 농장 노동자들의 파업과 학살에 바탕을 두고 있다.
아일랜드는 여러모로 우리와 닮았다. 식민 지배를 받아 남북이 분단됐으며, 노래가 '한(恨)'을 담고 있는 점도 비슷하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이태원에서 만난 아일랜드 응원단은 우리와 합석해 함께 술을 마시고 노래하다가 계산대에서 서로 돈을 내겠다고 실랑이를 벌였다. 그때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FT)는 "한국인은 '아시아의 아일랜드인'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노래, 춤, 술을 즐긴다"고 보도했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고(故) 이은주가 영화 '주홍글씨'에서 불러 더 유명해진 아일랜드 그룹 코어스의 '온리 웬 아이 슬립(Only When I Sleep)'이 끌린다. 6월 햇감자까지 곁들이면 곰팡이와 감자에 얽힌 아일랜드의 한이 떠오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