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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의 벌목공들

따이쉐뜨

러시아 이르쿠츠쿠의 작은 도시. 이곳에 네 명의 탈북자가 숨어 살고 있다.

러시아 바이칼호 동쪽, 인구 5만 여명의 작은 도시 따이쉐뜨. 이곳에 초로의 동양인 남자 네 명이 살고 있다. 김영남, 김봉산, 리원림, 김평원 씨. 허름한 옷차림에 나이보다 깊고 많은 주름. 게다가 평원씨는 이도 몇 개 남아 있지 않다.

생계는 건축일을 해서 이어간다. 하지만 겨울에는 일을 찾기가 수월치 않다. 단칸방 한 달 월세가 4천 루블(13만 원)인데 그조차도 버거울 땐 친분 있는 러시아인 집을 전전하며 지낸다.

이들의 국적은 북한. 각각 1995년에서 2000년 사이에 시베리아 북한 벌목소 노동자로 러시아에 들어왔다. 길게는 18년 전이다. 하지만 지금 이들은 탈북자다.

1967년 북한은 구 소련과 임업 협정을 맺고 러시아 벌목소에 자국 노동자를 송출하고 있다. 하바로브스크에 있는 임업 대표부를 중심으로 하바로브스크 주 체크도민에 제1 연합 기업소와 9개의 사업소, 아무르 주 틴다에 제2 연합 기업소와 6개의 사업소를 두고 있다. 최근에는 벌목 노동자보다 건설·농업 노동자로 송출되는 숫자가 더 많다고 알려졌다.

러시아 연방 이민국에 따르면 2013년 현재 러시아에서 합법적으로 일하는 북한 노동자 수는 21,447명이다. 사업소를 도망친 노동자 숫자는 알려진 게 없다.

70년대까지 북한은 주로 범죄자나 성분이 나쁜 자를 러시아 벌목소에 보냈다. 하지만 이들로 인해 소련 내 북한의 이미지가 나빠지자 80년대 들어서 자격 요건이 엄격해지기 시작했다.

사업장에서 도망치는 걸 방지하기 위해 러시아 송출 노동자는 반드시 아이를 가진 가장으로만 한정했으며 그중에서도 당원이거나 당의 추천을 받은 자만 뽑았다. 또 6개월 간 도당 위원회에서 사상 교육도 받아야 했다.

한 번 러시아로 송출되면 복무 기간은 3년이다. 노동자들이 러시아 사업장에 도착하면 해당 사업장에서 여권을 압수하는데 이 여권은 본국으로 돌아갈 때만 돌려준다.

생활은 기차 칸을 개량한 ‘빵통'에서 조별로 이루어진다. 한 조는 6~8명 정도다. 정해진 임금은 없고 일한 만큼 돈을 받는다. 노동자의 임금은 전표로 적혀져 북한의 가족에게도 보내진다. 이 전표는 일종의 러시아 노동자 가족 전용 상점인 재소 공급소에서만 사용할 수 있다.

90년대에 북한 경제가 나빠지자 러시아 벌목공의 인기는 더 높아졌다. 지원자가 몰렸고 당의 추천을 받기 위해 뇌물은 필수였다. 당시 이들도 돈을 벌겠다는 꿈을 품고 러시아 벌목공에 지원했다. 세간을 팔아 뇌물도 바쳤다. 하지만 어렵게 도착한 러시아에서 그 꿈은 금세 무너졌다.

2013년, 미 국무부가 매년 조사•발표하는 연례 인신매매 실태 보고서(TIP)는 북한을 최저 등급인 3등급으로 분류했다. 2003년 이래 11년 연속 최저 등급이다. 이 보고서는 중국 내 탈북 여성들에 대한 인신매매 문제를 비롯해 해외로 송출된 북한 노동자의 열악한 처우 문제도 지적하고 있다. 이들은 이동과 통신의 자유를 제약 당하고, 이들의 임금은 북한 당국이 관리하는 계좌로 들어가 다양한 명목으로 뜯기며, 사업장을 도망갈 경우 앙갚음을 당한다고 보고서는 밝히고 있다. 특히 러시아 벌목공은 1년에 이틀의 휴가밖에 없고, 할당량을 채우지 못 할 경우 처벌을 받는다는 내용도 담겨 있다. 국제 사회는 실제 사람을 사고파는 문제뿐만 아니라 북한의 해외 송출 노동자에 대한 억압과 착취 역시 인신매매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리원림을 비롯한 네 명의 탈북자는 이처럼 열악한 벌목소를 각각 2년 이상씩 견뎠다. 삼 년째 되는 해에는 본국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손에 잡은 돈이라고는 한 푼도 없었다. 결국 벌목으로는 돈을 벌 수 없다는 사실만 깨달았다. 이들은 돈을 벌기 위해 벌목소를 벗어나 인근 마을을 들락거리며 날품팔이 일을 했다. 벌목소에서는 이것을 ‘청부’라고 불렀다. 금지하는 일이었지만 돈이 나오지 않는 벌목소에 ‘청부’는 횡행했다. 벌목소 간부는 뇌물을 찔러주면 ‘청부’를 눈 감아줬다. 그러나 말도 통하지 않는 이국에서 돈을 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간부에게 뇌물을 주지 못 하는 시간 또한 길어졌다. 뇌물을 주지 못 하면 사업장을 벗어났다는 명목으로 처벌을 당할 것이었다. 결국 이들은 벌목소로 돌아가지 못 했다. 그로써 종종이나마 가족과 왕래하던 편지 길 역시 모두 막혔다. 그렇게 이들은 시베리아의 방랑자가 되었다.

처음에는 공사판에서 눈칫밥으로 끼니를 채우며 러시아 극동 지방을 떠돌았다. 그러다 십 년 전 이 마을에 정착했다. 다 합쳐 일곱 명이었다. 물설고 말 다른 객지에서 모여 살다 보니 모두 형제처럼 지냈다. 공사판 잔뼈가 굵어지자 일 잘하는 건설 기술자로 마을에서 소문도 났다. 하지만 러시아 사람들은 이들이 신분 없는 무국적자라는 사실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일을 해도 돈을 안 줘요. 돈을 달라고 하면 오히려 경찰에 넘기겠다고 겁을 줘요.”
“지나가던 사람들이 시비 걸고 우리 돈을 뺏어가는 일은 다반사입니다. 우리가 경찰에 신고 못 한다는 걸 이 사람들은 다 알고 있거든.”

2005년 김봉산 씨는 일을 하다 러시아 경찰에게 붙잡혔다. 러시아 경찰 옆에는 김일성 배지를 단 북한 보위부원이 함께 있었다. 탈북자를 잡으러 다니는 체포조였다. 남의 나라에서 수갑을 사용할 수 없었던 북한 체포조는 봉산 씨의 손을 스카치테이프로 감아 묶고 이르쿠츠크로 끌고 갔다. 가는 내내 뇌물을 요구했지만 그는 돈이 없었다. 결국 북송 될 위기에 처해졌다. 봉산 씨는 손을 비틀어 스카치 테이프를 끊고 도망쳤다.
“나중에 내가 내 손에 스카치 테이프를 다시 감고 한 번 끊어보려고 했어요. 절대 안 끊어져요. 그때 어떻게 끊었는지 나도 모르겠어요.”

그후 이들은 한국에 가겠다는 꿈을 꾸게 됐다. 잘 먹고 잘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잡혀갈 수 있다는 불안과 러시아인들의 차별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였다. 한국으로 가는 방법을 백방으로 수소문했다. 모스크바 UNHCR에 연락했지만 기다리라는 말뿐이었다. 몽골로 밀입국해 한국 대사관의 도움을 받으려고도 했다. 울란바토르 한국 대사관과 힘들게 연결된 전화는 도와줄 수 없다는 답변으로 끝났다.

소득 없는 세월을 보내는 동안 일곱 명 중 세 명이 병으로 죽었다. 병원은 가보지도 못 했다. 인근 묘지에 묻고 술에 취해 기쁠 때나 고향이 그리워 슬플 때 들여다봤다. 다음 차례는 자신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 차가운 이국 땅이 그들은 불안했다.

모스크바로

탈북자들을 난민으로 받아주는 UNHCR은 모스크바에 있다.

2013년 3월 14일.

녹지 않은 얼음이 지천인 따이쉐뜨에 북한 인권 활동가 김희태 씨(북한인권개선모임 사무국장)가 도착했다. 한국 라디오 방송을 듣던 리원림 씨는 한국에 탈북자들을 돕는 인권 활동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어렵게 김희태 씨와 연락이 닿은 것이었다. 김희태 씨는 중국, 라오스, 러시아, 베트남 등지에서 수많은 탈북자를 구해 낸 베테랑 활동가다.
“러시아에는 이들처럼 자신의 사업장을 도망친 탈북자들이 약 3천 명 정도 있는 것으로 추산됩니다. 이들은 국제 사회가 인정하는 난민이고 UN 난민 협약에 따라 원하는 나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는 직접 이들을 모스크바 UNHCR이나 한국 대사관으로 인도할 계획이다.

모스크바로 출발하기에 앞서 사람들은 살던 집과 살림을 정리했다. 가져갈 짐이라고 해봐야 가방 하나씩이 전부였다. 마지막으로 이들은 죽은 동료의 무덤을 찾았다.

1997년 러시아 연방 이민국은 북한 주민의 러시아 입•출국 및 러시아 영토에서의 이동을 엄격히 제한하는 조치를 취했다. 북한 노동자가 합법적으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면서 그들이 사업장을 벗어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치였다. 같은 해 러시아 아무르 주 경찰과 북한 벌목소 간부들은 사업장을 도망친 탈북자에 대한 합동 수사를 벌였다. 88명이 잡혀 아무르 주 블라고베쉔스크에서 강제북송 열차에 태워졌다. 하지만 이 과정이 러시아 기자들에 의해 보도됐고 자국 정부의 비인도적인 처사에 대해 러시아 국민들의 비난이 높아졌다. 그후 러시아에서 탈북자들에 대한 강제북송은 표면적으로는 줄어들었다.

북한 노동자들이 주로 송출되는 러시아 극동 지역 면적은 러시아 전체 면적의 36%를 차지하지만 이 지역의 인구는 현재 634만 명으로 러시아 전체 인구의 4.4%에 불과하다. 낮은 출산율과 타 지역으로의 인구 유출로 인해 2001년부터 2006년 사이에만 170만 명의 인구가 감소했다. 이로 인해 이 지역은 심각한 노동력 부족 현상에 시달리고 있다.

이 틈을 비집고 들어온 이들은 이 곳과 국경을 맞댄 중국인들이다. 2005년 기준, 러시아 극동 지역에 합법적으로 체류 중인 중국인 노동자 수는 25만 명, 불법 체류 중국인 노동자는 40만 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2012년 9월, 러시아 메드베데프 총리는 “극동지역을 인접국 국민의 과도한 팽창으로부터 보호하는 과제가 지금도 유효하다”라고 말했다. 러시아는 극동 지역의 중국화 현상을 매우 경계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극동 지역으로 송출되는 북한 노동자는 러시아 경제에 매우 중요한 요소다. 북한 노동자들이 사업장을 도망쳐 자유롭게 돌아다니게 방관할 수는 없는 것이다.

5일 후. 활동가 김희태와 네 명의 탈북자는 마침내 모스크바행 기차에 올랐다. 4,700Km, 기차로 꼬박 3박4일을 달려야 하는 거리다. 경찰의 검문에 걸리기라도 한다면 북송될 가능성도 있다.
열차 안에서 김희태 씨는 말한다.
“탈북자를 잡아 북한 대사관으로 넘기는 경찰들이 아직까지도 있습니다. 2010년 블라디보스톡에서 제가 직접 목격하기도 했고요. 모스크바까지 가는 이 길이 결코 안전한 길이 아닙니다.”

머나먼 한국

십수 년을 돌고 돌아 모스크바에 도착한 네 명의 탈북자들. 그들이 한국으로 가는 문을 두드린다.

2013년 3월 22일. 일행은 무사히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김희태 씨는 우선 한국 대사관에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다. 대사관 직원은 탈북자들을 대사관으로 데려오지 말고 UNHCR에 문의해 보라고 말했다. UN기가 펄럭이는 UNHCR 건물 입구는 쇠창살이 쳐져 있었다. 직원은 그 쇠창살 안에서 시민단체에 알아보라며 전화번호를 건넸다. 그 번호에 전화를 걸자 시민단체는 자신들 번호를 어떻게 알았냐며 화를 냈다. 어렵게 UNHCR 탈북자 담당자와 전화 연결이 됐다. 그는 UNHCR에는 수용할 공간이 더 이상 없으니 다시 돌아가든지, 모스크바에서 알아서 기다리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모두 당황했다. 다시 돌아갈 곳도 없었고, 모스크바에서 하염없이 기다릴 방법도 없었다. 모스크바는 탈북자를 반기지 않는 눈치였다.

그날 오후. 김희태 씨는 탈북자들을 이끌고 다시 한국 대사관을 찾았다. 탈북자들을 억지로라도 대사관에 진입시켜 보호를 요청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전화와는 다르게 대사관 측은 우선 상담을 해보겠다며 탈북자들을 받아들였다. 몇 시간 후, 밖에서 기다리던 김희태 씨의 전화기가 울렸다. 탈북자 리원림 씨였다.
“대사관에서 저희를 숙소로 안내한답니다. 저희를 받아준 것 같습니다.”
십수 년 동안 이어진 탈북자들의 방랑은 그렇게 끝이 났다. 김희태 씨는 말했다.
“한국인인 제가 도와줘도 이처럼 번거롭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과연 탈북자 개인이 이런 길을 시도했을 때 얼마나 성공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다음 날 김희태 씨는 탈북자들의 임시 숙소에 찾아가 그들을 만났다. 한국에 가면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고 묻자 김평원 씨는 북에 있는 가족 소식을 수소문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나는 나를 취재한 이 기사를 북한에 있는 우리 가족이 봤으면 좋겠어. 십수 년을 소식도 모른 채 살아왔는데 이렇게라도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내 아내와 자식들이 알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겠어.”

2013년 9월 4일, 박근혜 대통령이 러시아 샹뜨 페떼르부르그를 방문했다. 이에 맞춰 모스크바 UNHCR에 머물고 있던 열 명의 탈북자가 한국에 입국했다. 그 중에는 김영남, 김봉산, 리원림, 김평원 씨도 끼어 있었다. 한국에 가겠다는 수년 간의 꿈이 마침내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에는 아직도 수많은 탈북자들이 시베리아의 칼바람 속을 방황하고 있다.

 

취재 : 크로스미디어팀
웹제작 : 마인어스크리에이티브
지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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